2019年08月13日

한민족의 일제 치하 40년 고역

[원리강론 p554] 1895년 황궁에 침입하여 왕비를 학살하는 등 잔학무도한 일을 자행하기도 했던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제국주의적인 침략의 손길은 을사보호조약에 의하여 뻗쳐졌다.

즉 1905년에 일본의 이등박문과 당시의 한국 학부대신이었던 친일파 이완용 등에 의하여 한국의 외교권 일체를 일제의 외무성에 일임하는 조약이 성립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은 한국에 통감을 설치하고 필요한 지역마다 이사관들을 두어 일체의 내정을 간섭함으로써, 사실상 조선의 정치, 외교, 경제 등 주요 부문의 권리를 박탈하였던 것이니, 이것이 바로 을사보호조약이었다.

1910년, 일본이 강제로 조선을 합병한 후로는 한민족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하여 수많은 애국자들을 투옥 학살했고, 1919년 3·1운동 때에는 전국 도처에서 수많은 양민을 살육했다.

더구나 1923년에 일어난 관동대지진 때에는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를 퍼트려 동경에 거주하던 무고한 조선인들을 부지기수로 학살했다.

한편 수다한 한국인들은 일본의 학정을 견디다 못해 기름진 고국산천을 일본인들에게 내주고, 자유를 찾아 황막한 만주벌판으로 이민하여 와신상담의 세월을 보내며 조국광복에 진력하였다.

일본군은 이러한 한민족의 여러 부락을 찾아다니며 노인에서부터 유아에 이르기까지의 전 주민들을 한 건물 안에 감금하고 방화하여 몰살시켰다. 일본은 이 같은 학정을 제국이 멸망하는 날까지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3·1운동에서 혹은 만주벌판에서 쓰러진 민중은 주로 기독교 신도들이었다. 제국 종말기에는 기독교 신도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이에 따르지 않는 수많은 신도들을 감옥에 가두어 죽였다.

그 뿐만 아니라 8·15해방 직전 일제의 기독교 탄압정책은 실로 극악무도한 것이었다. 그러나가 일본 천황이 패전을 선언함으로써 한민족은 드디어 그 굴레로부터 해방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한민족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후 1945년 해방될 때까지 40년간 제1, 제2이스라엘 선민이 이집트나 로마제국에서 당한 것에 못지 않는 박해를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독립운동은 주로 국내외 기독교 신도들을 중심하고 일어났으며, 박해를 당한 것도 주로 기독교 신도들이었다.

posted by cigtimes at 22:40| Comment(0) | 섭리스페셜 摂理スペシャル | 更新情報をチェックす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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