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年09月12日

일제 검·경찰과 문선명 선생의 수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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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경찰부(현 광화문 광장)

"하늘의 섭리는 맞고 뺏는 원칙하에 발전한다"

일제 초기의 무단 통치하에서 악명을 떨쳤던 헌병경찰제도는 1910년 9월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면서 탄생했다. 합병 1년만에 헌병과 경찰 수가 두 배로 늘어 총 1만 4천여명에 달했다. 당시 헌병경찰의 권한은 '긴급한 처분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면 재판절차 없이 경찰서장이나 헌병대장이 즉결 심판할 수 있는 사법권에까지 미쳤다.

1912년 조선총독부는 '조선형사령'을 발령해 검찰과 경찰이 구속·체포·수색·압수 등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일본에서는 판사에게만 인정되었던 권한이었다. 이런 막강한 권한은 무엇보다도 조선인들을 보다 쉽게 지배하고 독립운동을 훨씬 수월하게 억압하기 위해서였다.

일제시대는 검찰을 위한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형성된 검찰 문화가 지금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수사권, 기소·불기소권, 형 집행권까지 모든 형사절차를 장악하고 있는 우리나라 검찰은 전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다.

일제시대 조선인들은 유독 경찰에 대한 원한이 깊었다. 독립운동만이 아니라 일상사까지 감시, 탄압함으로써 민중들의 생활에 피해를 입혔기 때문이다. 우는 아이 달래던 '호랑이와 곶감'이 '에비! 순사 온다!'라는 말로 바뀌었다.

1944년 11월 문선명 선생은 일본 유학 당시 항일운동을 한 사실이 탄로나 악명 높기로 유명했던 경기도 경찰부(경기도 일원과 서울 4개 경찰서 관할)로 연행됐다. 이곳은 1946년 '고문 경찰' 노덕술이 수사과장으로 임명돼 악명을 떨친 곳이기도 하다. 

"열두 시간 가까이 고문을 받고 피를 토한 적도 있고 15분 동안 사람을 미치게 하는, 평생 잊지 못할 고문도 받았다. '쳐봐라! 그 몽둥이가 부러지나 내 뼈가 부러지나'하며 견뎠다. 한번은 14시간 동안 취조와 구타를 당해 기어서 20m도 가지 못할 만큼 몇 번씩 죽었다 깨어났지만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말씀선집 33권 p116)

이런 상황에서도 선생은 일신의 어려움을 면케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고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아 동료들은 더 이상 잡혀 들어가지 않았다.

광복 직후 한반도에는 2만6677명의 일제 경찰들이 있었다. 그 중 조선인은 약 40%인 1만619명이었다. 이들은 이승만의 비호 아래 친일파 청산을 주장하는 요인을 살해하거나 일제시대와 마찬가지로 감시와 통제 그리고 공안 탄압의 주역이 되었다.

또한 미군정은 행정 경험과 능력을 통한 안정적 사회 운영을 이유로 일제의 판·검사를 그대로 유지했으며, 그들은 사법개혁을 반대하고 기존 체제를 옹호하는 데 앞장섰다. 당시 미군정 법률가들은 남한 사법체제를 '부자와 우파들의 수호신'이라 불렀다.

한편 이승만은 '치안국 특수정보과'(1953년)에서 민간인 사회에 대한 사찰업무를 담당하도록 했다. (*특수정보과→중앙정보부→안기부→국정원)

1955년 7월 4일 문선명 선생은 유효원 통일교회 초대 협회장 등 4명과 함께 경찰 당국에 의해 체포돼 '치안국 특수정보과'(중부서)로 연행된 후 서울지검으로 송치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 때 검사는 일제 검사 출신인 강서룡이었다.

7.4사건은 당시 이대·연대 등 대학가에서 열화처럼 번졌던 통일교회의 전도 열기에 놀란 기독교계 지도층과 이승만 정권의 일부가 주도한 대대적인 공작의 결과였다는 점에서 통일교회의 최대 수난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선생은 형무소장과 구치과장으로부터 천하대악의 주인공으로 온갖 멸시와 조롱을 받았으나 묵묵히 기도로 일관했다. 선생은 영적 직관력으로 형무관들의 비리사실을 지적하고 문책하곤 했으며, 수인들은 몽시 등으로 증거를 받고 선생을 귀한 분으로 존경하기 시작했다. 

약 2주가 지나자 형무소장과 구치과장, 간수들은 용서를 빌며 '선생님'이라 부르고 정중히 모시기 시작했고, 수박 참외 아이스크림을 대접하는 등 모든 편의를 제공했다. 또한 기결수들도 스승처럼 존경하며 비밀을 털어놓고 말씀을 듣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0월 4일 윤학로 주심판사의 심리로 열린 결심공판에서 선생은 무죄가 선고돼 석방됐고, 유효원 협회장은 벌금 5천환, 유효영, 유효민, 김원필 씨 등은 징역 8개월 형을 언도받았다. 

민족수난의 1번지인 서대문형무소는 지금까지도 온갖 소문으로 통일교회의 명예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현장이기도 하다.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일제당국의 핍박'과 '선생에 대한 기독교계 정부당국의 핍박'은 묘한 섭리적 인연을 떠올리게 한다. 

결국 무죄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이 사건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던가? 민주사회에서 어떻게 소문만으로 종교 지도자를 구속할 수 있었을까? 불명예가 뒤따를 수밖에 없는 미결의 옥중생활을 3개월이나 하게 했을까?

그러나 하늘의 섭리는 맞고 빼앗아오는 원칙 아래 발전되기에, 이 사건을 계기로 신자들은 더욱 일치단결하여 발전은 가속화되었고, 통일교회 교세를 세계화할 수 있는 발판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말씀선집 중에서)

"미군이 들어오면서 한국 정부가 무슨 일을 했느냐 하면 신령한 목사들을 앞세우지 않고 신사참배한 사람들, 즉 영어할 줄 알고 외국에 가서 공부하고 왜정 때 일본 앞잡이 노릇하던 그 목사들을 다시 세운 것입니다. 신사참배한 목사들을 다 제거해 버리고 신사참배 하지 않은 목사들을 중심으로 하나되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이승만 박사나 박마리아를 중심한 자유당 사람들이 선생님의 말을 안 들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한국이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때 선생님의 말을 들었다면 한국이 지금 이렇게 안 되었을 것입니다. 중국 공산당도 다 녹아났을 것입니다.

만일에 이승만 박사가 선생님의 말을 들었다면 소련 공산당은 벌써 내 손에 없어졌을 것입니다. 만약 이 사상을 40년 전에 한국이 받아들였더라면 일본은 한국과 하나되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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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gtimes at 20:28| Comment(0) | 섭리스페셜 摂理スペシャル | 更新情報をチェックす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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